과거없는 미래없다. IT 업계도 마찬가지다. 역사라는 것이 단절이 아니듯 IT 산업 역시 과거와 미래가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있다고 단정해도 좋다. 때문에 IT 산업의 경우 어느 분야나 할 것 없이 지난해를 회상할 경우 다음해 대강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 매년 연말연시마다 각 언론이 지나간 해의 사건들을 돌아보면서 앞으로 전개될 한해를 전망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이런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올해에도 결코 과거 지향적이라고만 하기 어려운 과거 회고에 나설 경우 작년의 대 사건중 가장 먼저 꼽힐 사건은 아무래도 렌샹(聯想)의 IBM 컴퓨터 사업 부문 인수가 아닌가 싶다. 작년 5월 처음 언론에 보도된 이후 6개월의 긴 여정을 거친 후 연말 드디어 `뱀이 코끼리를 삼켰다'는 런민르바오(人民日報)의 보도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실제 이번 인수, 합병은 중국 IT 업계 사상 최대의 엄청난 대이변으로 당분간 비견될 사건이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당연히 이에 따른 충격파는 엄청나다. 우선 렌샹은 일거에 변방의 그저 그렇고 그런 PC 업체라는 선입관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세계 유수의 메이커로 등장하는 계기를 잡게 됐다. IT 업계 부동의 만년 2위 자리를 벗어나는 전기를 맞이하게 된 사실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올해 수년째 1위를 고수해 온 하이얼(海爾) 보다 거의 두배 이상 많은 2000억위안(元ㆍ26조원)대의 매출액을 올릴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작년 매출액과 비교하면 거의 3배 이상의 실적을 올릴 것이 확실하다.
경쟁업체들의 M&A 노력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사실 역시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먼저 IBM과 전략적 제휴관계를 청산한 창청(長城)컴퓨터를 거론해야 할 듯 싶다. 롄샹에 결정적으로 맞은 한방을 만회하기 위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업체와의 제휴 혹은 M&A에 나설 가능성이 농후하다. 기술에 관한 한 렌샹에 뒤지지 않는다는 자존심의 칭화퉁팡(淸潢方)과 팡정(方正)을 거론하지 않는 것 역시 곤란하다. 렌샹의 M&A 노하우를 면밀히 검토한 후 어떻게든 몸집 불리기에 나설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이중 팡정은 동남아와 미주 지역에 깔려 있는 지사 네트워크의 동원이 가능해 칭화퉁팡을 필두로 한 그 어느 업체들보다 우월한 입장에 있다. 중국 IT 당국의 전폭적인 지원도 큰 힘이 되고 있다.
차이나텔레콤(中國電信ㆍ중궈디엔신), 차이나모바일(中國移動通信ㆍ중궈이둥퉁신), 차이나유니콤(中國聯通ㆍ중궈롄퉁)등 이른바 3대 메이저 텔레콤 업체 경영진들의 연쇄 이동은 올해 시작될 3G 사업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대사건으로 꼽을 수 있다. 텔레콤업계의 대표적 거물들인 왕젠저우(王建宙), 창샤오빙(常小兵), 왕샤오추(王曉初)등이 약속이나 한 듯 `헤쳐모여'에 나서 각각 차이나모바일 총경리, 차이나유니콤 회장, 차이나텔레콤의 총경리등으로 자리를 서로 바꿔앉았다. 당초 차이나모바일과 차이나유니콤에만 주어지기로 했던 3G 사업 참여업체가 3-4개사로 늘어날지 모른다는 소문의 확실한 진원지가 되고 있다. 통신 당국이 기득권을 주장할 가능성이 높은 양사의 반발을 막기 위해 아예 이들 3개 업체의 경영진들을 의도적으로 솎아버리는 고육책을 썼다는 분석이다.
WAPⅠ표준의 도입 연기는 충격적이라는 말 아니고서는 설명할 길이 없다. 원래 4월 22일까지는 국산 초고속통신망 IP 표준인 WAP는 랑차오(浪潮)가 사업을 6월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대체로 결론이 나 있었다. 그러나 이날 중국 당국은 갑자기 이 기술 표준을 당분간 강제로 도입하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다. 현재로서는 이 사업이 완전히 물건너갔다고 하기는 어려우나 조만간 다시 거론되기도 쉽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휴대전화 단말기업계의 떠오르는 별로 유명하던 완밍젠(萬明堅) TCL 이동통신유한공사 총경리의 사직과 중소업체를 대표한다는 이메이(易美)의 퇴조 역시 놀랄만한 사건으로 손색이 없다. 특히 이메이의 퇴조는 대기업 중심의 단말기 업계에 중소기업의 진입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가 아닌가 보인다. 한때 슝마오(熊猫)와 함께 무서운 신예로 두각을 나타냈으나 자금력과 애프터서비스에서 취약한 한계를 극복해내지 못했다.
향후 시장에 진입하려는 중소업체들의 반면교사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는 나름의 역할을 했다고는 볼 수 있다. 이에 반해 완밍젠 총경리는 TCL의 작년 실적이 나름대로 괜찮았음에도 낙마하는 비운을 감수해야 했다. 아마도 총재인 리둥성(李東生)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원인이 아니었나 보인다. 겉으로는 화려하나 속은 빈 강정이라고 해도 좋은 휴대전화 단말기업계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사건이 아닌가 보여진다. 실제 이같은 현실을 반영하듯 금년에도 중국 휴대전화 단말기업계는 생산과 수출이 공히 1억8000만대 전후에 이르는 시장을 성장할 것이 예상되나 짭짤한 수익을 내는 업체들은 많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출혈 수출과 밀어내기식의 악폐가 여전할 경우 허울 좋은 세계 1위 산업이라는 묘한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마이크로소프트와 국산업체들이 베이징(北京) 정부가 실시한 소프트웨어 구매 입찰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인 사실도 나름대로 놀라운 사건으로 손색이 없다. 비록 최종 승리는 국산 업체들에게 돌아갔으나 향후에도 계속 마이크로소프트의 공세가 만만치 않을 것임을 상기하면 더욱 그럴 것 같다. 소프트웨어 업계 관계자들이 "국산업체들이 가격 경쟁력과 국산 제품에 대한 우선 사용을 주창하는 베이징 정부의 배려가 없었으면 경쟁에서 승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강조하는 것은 무엇보다 이런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ERP와 CRM을 비롯해 거의 전 품목의 기술 업그레이드와 품질 향상이 절실한 것이 업계의 솔직한 현실이다.
가난한 자들의 휴대전화로 불리는 샤오링퉁(小靈通)과 일반 GSM 및 GPRS등과의 단신 메시지 서비스 교환 업무 개시는 더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 같다. 이 조치는 현재 매일 수백만통의 단신 메시지가 서로 교환되는 결과로 나타나고도 있다. 이로 인해 퇴출 위기에 몰렸던 샤오링퉁은 일단 한숨을 돌리게 됐고 향후 수년동안은 매년 수백만명의 가입자를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 금년의 대사건들로는 창훙(長虹)그룹의 니룬펑(倪潤峰)총재와 창청컴퓨터의 왕즈(王之)총재의 퇴진, TCL의 톰슨과 알카텔 흡수, 합병, 중미간의 반도체 무역 마찰, 퉈푸(托普)의 경영권 마찰등이 더 꼽힌다.
올해 중국은 새로 시작하는 사업들이 많다. 대강 꼽아도 3G 서비스, 디지털 TV 시범 방송, 리눅스의 개발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올해가 작년보다 더 많은 사건을 양산하는 한 해가 될 것이라는 얘기가 아닌가 보인다. 연초부터 각종 언론이 올 한해 IT 산업에 대해 이례적으로 많은 각종 보도와 특집 경쟁에 나서는 데에는 다 까닭이 있지 않나 싶다.
